2-6~10 구시로의 근대 초기와 근대1

ページ番号1013690  更新日 2023年12月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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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에도시대의 구시로

에도시대(1603~1867년) 동안 홋카이도의 일부 지역은 봉건 영주 마쓰마에(松前) 씨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마쓰마에 씨는 홋카이도 선주민인 아이누와의 독점적 교역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구스리’라고 불리던 구시로 강 하구 지역에는 아이누 마을이 있었습니다. ‘구스리’는 ‘건너는 길’이나 ‘목’을 뜻하는 아이누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마쓰마에 씨는 ‘구스리’를 이 지역의 아이누와 교역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쓰마에 씨의 가신들이 아이누와 직접 교역을 했지만,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상인들이 교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스리’ 마을은 발전하여 구시로 마을이 되었고, 홋카이도 동부의 어업, 교역,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에도시대 말까지 청어, 연어의 어획량과 다시마 수확이 늘어나면서 도호쿠 지방에서 이 지방으로 오는 어민들이 늘어났습니다. 또한, 구시로는 북일본과 오호츠크해, 쿠릴열도를 잇는 주요 항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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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안개의 도시

여름에 태평양에서 유입되는 따뜻한 공기가 북상하여 홋카이도 동부의 더 시원한 해안선에 도달하면 안개가 끼게 됩니다. 구시로는 여름에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 ‘안개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시로는 주요 항구인데 시야가 좋지 않으면 선박의 항행에 지장을 초래합니다. 이런 이유로 1891년에 구시로자키 등대가 건설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 등대에는 안개가 발생했을 때 경고음을 내는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922년 7월 황태자 히로히토(1901~1989년. 후의 쇼와 천황. 천황 재위 기간은 1926~1989년)가 짙은 안개가 꼈을 때 구시로를 방문했는데, 이때 등대에 무적(霧笛)을 설치하도록 구시로시에 권유했습니다. 무적(霧笛)은 192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나팔 모양 부분은 ‘취명기’라고 불리며, 압축된 공기를 증폭시켜 저주파수 경고음을 냈습니다. 취명기는 1962년 전기식 취명기로 교체되었지만 이것도 2010년에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배의 항해 설비의 발달로 무적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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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홋카이도 동부의 목재 집적지

홋카이도의 임업은 홋카이도 전역에 광활한 삼림이 있는 덕분에 메이지, 다이쇼시대(1868~1926년) 동안 발전했습니다. 1899년에는 목재와 농산물을 해상으로 운송하기 위해 구시로항이 개항했습니다. 1901년 구시로는 홋카이도 중앙의 도카치 지방 및 북부의 기타미와 철도로 연결되었습니다. 구시로는 홋카이도 동부의 교통 요지가 된 것입니다.

숲에서 벌채된 통나무가 철도와 강을 통해 운반되는 구시로에는 목재 야적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대부분의 목재는 일본의 다른 지역과 해외로 운송되었지만 일부는 구시로에 있는 공장에서 목재와 종이, 펄프로 가공되었습니다. 그중 몇 곳의 공장은 현재도 조업하고 있습니다.

땅이 눈으로 뒤덮이는 겨울에는 ‘바치바치’라고 불리는 말썰매를 이용해 숲에서 기차역이나 강배로 통나무를 운반했습니다. ‘바치바치’라는 이름은 도호쿠 방언으로 ‘짧다'라는 뜻을 가진 ‘바치’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바치바치’의 모양은 단순했으나 유용했습니다. 고정된 길이의 썰매 한 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 대의 짧은 썰매를 통나무의 앞과 뒤에 묶어서 사용한 것입니다. 두 대의 썰매는 어떤 통나무에도 맞게 조정할 수 있어 눈 위를 부드럽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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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채탄과 도모코 제도

1916년 구시로에서 대규모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으며, 이 지역의 태평양 탄광은 일본 최대의 탄광이 되었습니다. 석탄 채굴은 아세틸렌가스를 사용한 카바이드램프 불빛 아래에서 깊은 지하의 탄층을 파내는 고된 육체노동이었습니다.

광부들은 ‘도모코’라고 불리는 작업 집단을 조직했습니다. 각 집단에서는 감독 역할을 하는 선배 광부가 대장이 되었습니다. 신입 광부는 ‘도모코’에 들어가기 전에 3년간 제자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집단들은 일본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기 전에 시작되었지만, 기술 공유를 촉진하고 서로 돕도록 장려하는 유사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도모코’의 광부들은 돈을 모아서 부상, 재해, 탄광 폐쇄 때에는 서로를 도와주고, 결혼이나 장례식 같은 행사 비용에 충당했습니다.

신입 구성원은 정식 의식을 통해 동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의식에서는 결속의 상징으로 술잔을 공유하고 다른 성원들과 술을 나눠 마셨습니다. ‘도모코’ 구성원의 이름과 주소는 종이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명부를 통해 구시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도모코 제도는 1930년에 이 탄광에 도입된 기계화와 사회보장의 발달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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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가와사키부네

가와사키부네는 돛이 달린 튼튼한 목조 트롤선으로 거친 바다에서도 배를 저을 수 있는 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가와사키부네는 에도시대(1603~1867년) 후기부터 1945년까지 후쿠이현에서 홋카이도에 이르는 일본해(한국 동해) 연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메이지시대(1868~1912년) 동안 가와사키부네는 주로 근해 대구잡이에 사용되었으며, 혼슈와 홋카이도 간의 교역과 정착민 수송에 이용되었습니다.

구시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배는 실물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이 배는 1983년 구시로시립박물관이 개관했을 때 이 지역의 배 목수인 히라이와 하지메(平岩一) 씨가 건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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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국어 텍스트는 일본 관광청에서 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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