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5 구시로의 근대 초기와 근대2

ページ番号1013691  更新日 2023年12月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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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어업을 위한 전통적인 작업복

구시로의 어업은 특히 혹독한 겨울철에는 중노동이었습니다. 근대의 따뜻한 천이 생기기 전까지 어부들은 ‘사시코’라고 불리는 짧은 겉옷(이 지역에서는 ‘돈자’라고도 함)을 입고 보온에 힘썼습니다. 이 겉옷의 이름은 쪽 염색을 한 면이나 삼베 천을 겹쳐 꿰매는 데 사용하는 ‘사시코’라는 홈질의 일종인 바느질 방식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느질이 만들어 낸 무늬가 있는 이 겉옷은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적이었습니다. 이 겉옷은 가족 대대로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사시코’는 기모노처럼 생겼으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천을 겹쳐대고 소맷단은 좁게 되어있었습니다. 다음 해의 어로기에 대비해 겨울 동안 이 ‘사시코’를 만들고 수리하는 것은 보통 어부 아내의 일이었습니다. 홋카이도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년)부터 메이지, 다이쇼시대(1868년~1926년)에 모직물과 면플란넬이 수입되어 널리 사용되기 전까지 ‘사시코’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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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번창하는 도시

메이지시대(1868~1912년) 후반 이후 구시로는 어업, 임업, 석탄산업, 해운업의 중심지로서 번창했습니다.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1922년에 구시로시가 되었습니다. 신문이 창간되었고, 정착민 유입에 대응하기 위해 가게가 늘어났습니다.

구시로의 겨울 기온은 영하에 머무는 경우가 흔합니다. 메이지시대에는 기모노 위에 입는 ‘가쿠마키’라는 양털로 된 큰 숄이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남성들은 망토와 모피 옷깃이 달린 소매가 없는 양모 코트인 ‘니주마와시’를 입었습니다. 이 ‘니주마와시’는 스코틀랜드의 인버네스 코트를 바탕으로 양복뿐만 아니라 일본식 복장 위에도 입을 수 있도록 개량한 것입니다.

구시로는 사사키 요네타로(1868~1951년) 같은 기업가 정신이 탁월한 사람에게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는 구시로보다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이주해, 1901년 쌀과 기타 생필품을 파는 가게를 열었습니다. 구시로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그는 시의회 의장으로 취임했고, 구시로 지방의 역사를 처음으로 집필했습니다. 그의 가게 간판에는 가게 이름이 금박으로 적혀있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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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구시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 전역의 도시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떨어지는 잔해와 불길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충전재를 넣은 천으로 된 방공 두건을 착용했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 미국 제3함대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오른 그러먼 F6F 헬캣(Grumman F6F Hellcat) 전투기가 홋카이도에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7월 14일과 15일 양일간 구시로를 비롯한 홋카이도의 도시와 혼슈 북부가 공습을 받았습니다.

이 이틀간 구시로는 8차례 공습을 받았으며, 공장, 철도, 어선 및 학교가 표적이 되었습니다. 시가지에 대한 격렬한 공격의 목적은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시로 시가지의 누사마이 다리는 피해를 입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누사마이 다리의 아르데코 양식 돌기둥 중 하나는 강에 떨어졌고(돌기둥의 상부는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음) 철제 측면 부분은 기관총 공격을 받았습니다. 총알 구멍이 뚫린 두께 10mm가 넘는 누사마이 다리의 철판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틀 동안 19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망자의 약 60%는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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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열구 엔진

열구 엔진은 단순 내연기관으로 1886년 영국에서 처음 개발되었습니다. 혼스비 아크로이드 석유 엔진(Hornsby-Akroyd oil engine)이라는 초기 형식의 엔진이 몇 년 후 일본에 들어왔으며, 일본 국내 제조자가 이를 개조했습니다. 열구 엔진은 사용이 간편하고 제조하기 쉬우며 저렴한 연료로 작동했습니다. 1913년 수 척의 참치 어선이 앞바다에서 큰 폭풍에 휩쓸려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구시로 어부들은 이 엔진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사용했습니다. 이 사고에서는 참치 어선들이 항구로 돌아가지 못해 어부 63명이 사망했습니다. 열구 엔진 덕분에 어장 왕복 시간이 단축되었으며, 출어 구역이 확대되었습니다.

열구 엔진이 있는 배는 엔진의 리드미컬한 소리 때문에 ‘통통배’라고 불렸습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 열구 엔진은 더 강력한 디젤 엔진으로 서서히 대체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열구 엔진은 1952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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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농업용 간이궤도: 지역의 생명선

일본 정부는 1860년대 이후 일본 각지에서 홋카이도 이주를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홋카이도 내륙지역에 거주하기는 어려웠습니다. 1920년가 되어도 삿포로에서 출발하는 국철은 홋카이도 동부의 연안지역까지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내륙지역 도로의 대부분은 흙길이었기에 악천후 시에는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홋카이도 동부의 내륙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농업용 ‘간이궤도’를 건설했습니다. 이 철도는 비용 절감을 위해 협궤 선로를 사용했습니다. ‘간이궤도’의 첫 노선은 1924년에 개통했으며, 구시로 동쪽의 앗토코역과 더 내륙에 있는 나카시베쓰를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로를 달린 것은 말이 끄는 차량이었지만 교통량이 늘어나자 휘발유로 움직이는 기관차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열차들은 개척지 마을의 생명선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시로로 나르고 수확물과 유제품을 시장까지 운반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구급차 역할도 다했습니다. 이 지역의 많은 가정에 전기도 전화도 없었을 무렵,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철도 사무소에 가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열차는 협궤 선로를 달리기 때문에 눈이 쌓이면 뒤집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지역 사람들은 힘을 합쳐 열차를 일으키곤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디젤 엔진이 도입되었지만 열차는 노면 전차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1량 편성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이 소형 철도 노선의 대부분은 도로로 바뀌었습니다. 지역 개발에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 선로는 차례차례로 철거되거나 버려졌고, 1970년경까지 영업을 계속한 것은 홋카이도 동부와 북부의 몇 안 되는 노선뿐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들판과 숲에서는 간이궤도 선로의 흔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궤도 차량의 일부는 구시로 북쪽의 쓰루이무라와 구시로 동쪽에 있는 베쓰카이초의 오쿠유키우스역이라는 폐역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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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국어 텍스트는 일본 관광청에서 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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